4월 2일 스타트업 얼라이언스에는 사복경찰들이 진을 쳤습니다.삼엄한 경비를 뚫고 나타난 건 찰스 리프킨(Charles H. Rivkin) 미국무부 경제 차관보였습니다. 한국 정부와의 일 말고도 스타트업에 관심이 많다며 방문했다지요. 차관보는 이따금 주먹을 쥐고 창의성, 도전의식을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제게 꽉쥔 주먹보다 힘 있었던 건 “19살 딸에게 모든 문이 열려있는 세상을 물려주고 싶다”는 말이었습니다. ICT 업계에서의 성평등 이슈를 한 마디로 정리하는 문장이었기 때문이죠.

엘렌 파오(Ellen Pao)의 소송 건으로 한동안 실리콘 밸리가 들썩였습니다. 파오는 2012년 실리콘밸리에 있는 벤처투자기업인 클라이너 퍼킨스 앤 바이어스에서 일했습니다. 그녀는 자신보다 실적이 나쁜 남성들이 먼저 승진하는 모습을 보고 회사에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결국 파오는 소송을 시작했고 미운털이 박힌 그녀는 회사에서 잘렸습니다.

엘렌 파오는 3월 30일(현지시간 기준) 소송에서 졌습니다. 여성 6명, 남성 6명으로 이뤄진 배심원은 그녀가 차별받았다는 근거를 찾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회사도 “그녀는 뛰어난 실적을 낼만한 경험이 부족하다”고 이야기했죠. 자유와 진보를 좇는 실리콘밸리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았다는 사람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불명예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런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구글, 페이스북 등 미국 IT 기업은 매년 다양성(diviersity) 보고서를 내고 있습니다. 기업 내 소수 직원을 배려하자는 취지지요. 성별뿐만 아니라 직원 중 인종, 장애인 비율을 보여주면서 회사 운영이나 활동에 참여하도록 권장합니다.

하지만 텍스트를 벗어난 실행은 미진한가봅니다. 파오의 소송 건 전에도 페이스북, 구글 등에서 일하던 여성들이 “IT 기업에 남성이 많다보니 ‘부라더후드(Brotherhood, 남성들끼리의 공감대로 형성되는 카르텔)’가 심하고 여성을 승진, 임금, 기업문화 등에서 차별한다”고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러다 이 소송까지 온 거지요.

한국의 IT 기업 문화는 어떨까요. 공시를 목적으로 한 보고서 속에 남녀 직원 수 비율은 있지만 IT 기업이 따로 ‘다양성 보고서’라고 이름 붙인 건 없습니다. ‘다양성’을 성별에 적용하는 것 자체가 익숙지 않습니다. 다만 이 분야의 여성 수가 적다는 문제의식은 있는 것 같습니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이 2014년 11월 내놓은 'ICT산업 내에서 성별임금격차 분석’ 보고서를 보면 여성 고용 비중은 상당히 낮습니다. 통신서비스와 소프트웨어 및 정보서비스업에서 여성은 4명 중 1명입니다. 정보통신전문가와 기술직 인력에서 여성의 비중은 16.4%로 더 낮습니다.

여성과 남성의 근속연수 차이도 2배 가까이 납니다. 남성은 7.5년, 여성은 4.9년입니다. 또 경력이 10년 넘은 종사자 중 여성은 10명 중 1명이입니다. 경력 단절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지요.

이 보고서의 결정적인 문구는 “한국에서는 성별 임금격차 중 그룹 특성 차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차별로 간주될 수 있는 부분)이 상당히 크다”와 “한국 ICT 산업에 임금 차별과 유리천장(여성이 조직 내에서 어느 직급 이상 올라가기 힘든 현상)이 있다”는 겁니다.